최근에 독서를 시작하면서 전에 구입했던 책들을 다시 찾아서 읽는 경우가 많다. '노르웨이의 숲'역시 전에 구입해서 1/3정도 읽었다가 바빠서 다 읽지 못했기에 다시 꺼내서 처음부터 읽었다. 전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소설을 리디셀렉트를 통해 읽었는데 가벼운 소설이라 쉽게 몰입해서 금방 읽었었다. 그 책의 주인공의 이름이 '하루키'이기 때문에 문득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어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의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을 구매하였다. 이 책이 1987년에 발간되었으니 벌써 33년이나 되었다. 이 책에서는 30년 이상 된 책들만을 읽곤 하는 인물도 등장하는데, 그 인물의 기준에 봤을때도 고전이다. 유명한 고전 소설이라고 생각하여 선정하였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상당히 많이 자살한다(...). 자살하는 인물이 하도 많이 나와서 오죽하면 '자살을 다룬 소설'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라면 요약할 수는 있겠지만, 각각의 장면과 인물간의 관계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들이 달라서 크게 의미는 없을것 같다. 주인공 와타나베가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자아성찰이라고 해야할까.
소설이라 딱히 메모나 코멘트를 적어두지는 않았다. 서평에 전반적인 독후감을 적어보려고 한다.
아.. 하필 이부분을 쓰다가 처음으로 글을 모두 날려보았다. 기분이 상당히 좋지 못하다, 특히 방금 쓴 서평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무슨 내용이 기억인지 안날 정도로 몰입해서 모두 적어내려왔는데 한순간에 사라지니 너무 아쉽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처음부터 차분히 써봐야겠다.
이 책의 인물들은 각각이 삶과 죽음의 어느 선상에서 위치해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 기즈키는 17살에 자살한 죽음에 위치한 인물이고, 나오코는 죽음으로 향하는 인물이다. 미도리는 삶의 한복판에 위치한 인물이고 레이코는 삶으로 향하고 있는 인물이다. 나오코와 기즈키는 어릴때부터 함께 자라 모든것을 공유한 '이어져있는' 등장인물이다. 기즈키가 자살한 이후에 나오코도 병을 얻게되고 와타나베는 이런 나오코와 함께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한다. 결국 나오코는 죽음을 택하고 와타나베는 방황하게 된다. 방황의 끝에 나오코와 동일시되는 레이코와 함께 나오코를 기리는 장례를 치르고, 노래를 부르고, 몸을 섞음으로써 와타나베는 삶으로 향하게 되고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게 된다.
'상실과 재생'이 하루키 문학의 영원한 주제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도 기즈키를 대변하는 '상실' 미도리와 레이코를 대변하는 '재생'을 주제로 한다. 인물들이 각각 삶과 죽음의 선상에서 다른 위치에 있는것이 흥미로웠으며 다음번에 읽을때는 각 인물들의 행동이나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진시황이고 이건희고 이만희고 중환자실의 환자고 모두 예외는 없다. 나오코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나오코에게 더 좋은 일인가? 삶이 죽음보다 힘들었던건 아니였을까? 그렇다면 나오코를 동정하는 것은 산자의 오만이 아닐까? 살아있는 것이 좋은 것은 산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않나? 자살이 무조건 틀린 선택은 아니라고 봐야하나? 삶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어가야만 하는 것인가?
삶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어가야만 하는 것인가? 내가 죽는다면 이 세상에 내가 남기는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난 예전부터 그래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 세상에 나의 DNA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 아니라면 업적을 남겨 이름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으면 그건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몇일간 삶에 대한 고민들을 이어가 보았지만 결국 결론내리진 못했다. 삶이 끝날 때 까지 고민하는게 인생인가 싶기도 하다.
와타나베는 레이코와의 관계를 통해 '재생'을 선택하고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정작 와타나베는 어디냐는 미도리에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소설이 끝난다. 이런 삶에 대한 생각들이 '어디에 있냐'는 질문이 아닐까? 와타나베의 삶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내가 언제 읽었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 질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10대였다면 자살한 기즈키에게 더 몰입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30대라 그런지 젊은 나이의 죽음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더 버텼으면 어땠을까 하는 꼰대같은 생각도 해보고 말이다. 40대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과연 어떨까? 다양한 상징과 의미들이 있어서 언제 다시 읽어도 다른 생각을 할 것 같고 재밌을 것 같다. 언젠가 휴가때 해변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사색에 잠겨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어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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